
고2때 최강 경북고에 노히트노런, 일약 전국적인 스타로
1984년 한국시리즈서 혼자 4승, 영원한 무쇠팔 에이스
김수인(27회) 야구 칼럼니스트․수필가
1984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는 다윗(롯데)과 골리앗(삼성)의 싸움이었다. 롯데는 타격에서 ‘Y-Y포(김용희-김용철)’가 건재했지만 마운드는 ‘황금팔’ 최동원(31회, 1958~2011)이 홀로 버텼다. 하지만 삼성에는 김일융, 김시진, 권영호, 황규봉 등 막강 투수진에 최초의 타격 3관왕인 이만수와 ‘방망이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은 친다’는 타격의 달인 장효조 등이 포진해 롯데는 삼성의 상대가 안됐다. 팀간 전적에서도 마지막 2연전서 삼성이 ‘져주기 승부’를 하기까지 5승 13패로 완전히 눌렸다.
전력이 워낙 약했기에 롯데 강병철감독은 대구, 부산의 4경기서 1승만 따내 잠실에서 한번만이라도 경기를 갖는 계획을 세웠다(7전4선승제였으므로 4차전까지 1승만 거두면 잠실에서 5차전을 가질수 있었음). 그래서 에이스 최동원을 1,3차전 선발로 내보내는 강수를 뒀다.
최동원은 강감독의 기대 이상으로 역투를 했다. 1차전 4대0 완봉승, 3차전은 3대2 완투승으로 시덥잖게 한국시리즈를 지켜보던 롯데 팬들을 열광시켰다. 시리즈 전적 2승2패로 맞선 5차전에서는 2-2인 7회 삼성 대타 정현발에게 결승홈런을 맞아 2대3으로 아깝게 완투패했다.
하루뒤 열린 6차전, 강감독은 자포자기식으로 임호균을 선발로 내세웠다. 하지만 임호균은 1회 1실점했을뿐 뜻밖의 호투를 했고 4회말 홍문종-김용철-김용희(28회)의 클린업트리오가 연속안타로 3점을 뽑아 3-1 리드를 잡았다.
강감독은 “이때다!”싶어 5회부터 바로 최동원을 마운드에 올렸다. 최동원을 6차전 구원투수로 쓰면 하루뒤 열리는 7차전 기용은 힘들었지만 그야말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였으므로 최동원을 전격 투입하지 않을수 없었다. 결과는 6대1 승리, 최동원은 3승째를 따냈고 시리즈 승패는 3승3패! 누구도 최후 승자를 점칠수 없었다.
그런데 하늘은 롯데편이었다. 7차전이 열릴 10월 8일, 서울에 비가 내려 경기가 다음날로 늦춰진것. 4경기 31이닝 역투로 지칠대로 지친 최동원에게는 달콤하기 짝이 없는 하루 휴식이었다.
강병철감독, 최동원 5경기 투입 초강수
7차전 선발이 누구인가는 말하나마나였다. 강감독과 최동원은 눈짓 교환으로 ‘선발 특명’을 주고 받았다. 최종 7차전의 승부는, 올드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생생히 기억하는 유두열의 8회 장쾌한 역전홈런(3점), 9회말 2사후 삼성 장태수를 삼진으로 돌려세워 처절한 승부를 끝낸 최동원의 눈부신 강속구, 그리고 포수 한문연과의 감격넘치는 하이파이브,,,(7차전은 입석포함, 티켓을 무제한으로 팔아 82년부터 현재까지 한경기 최다 기록인 3만6천100명이 입장,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룸. 지금은 잠실 경기 2만5천명만 입장. 롯데팬 2만6천여명이 유두열의 역전홈런후 당시 인기곡인 윤수일의 ‘아파트’를 한마음으로 떼창, 잠실벌을 들썩인건 일대장관이었다).
이로써 최동원은 프로야구 역사에서 전무후무할 ‘한국시리즈 단독 4승’의 금자탑을 세웠다(118년 전통의 월드시리즈에서 투수 혼자 4승을 올린 적은 없으며 일본시리즈에서는 이나오 가즈히사가 1958년 딱 한번 4승을 기록했음).
최동원은 1958년 5월 24일 경남 남해군 남해읍 북변리에서 태어났다. 7살 때 부산 동대신동으로 이사해 구덕국민학교에 들어갔다. 부친 최윤식(1931~2003)은 최동원을 야구 투수로 키우기 위해 구덕국교 1학년때부터 캐치볼 훈련을 시켰다. 집안에 TV 안테나를 별도로 설치, 그당시 보기 힘들었던 일본 프로야구와 고교야구를 수시로 시청케 하며 투구 폼을 연마시키기도 했다.
6․25때 다친 부친의 열성어린 캐치볼 훈련
특히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인 호리우치 츠네오의 다이내믹한 폼을 익혀 평생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만들었다. 최동원은 구덕국교 5년때 야구부에 들어갔는데, 경남중-경남고를 거치며 황금팔의 명성을 쌓은 것은 오로지 부친의 열성어린 가르침 덕분이었다.
부친은 한국전쟁때 전투중 한쪽 다리를 잃어 의족 생활을 했는데, 최동원이 훈련에 지칠때나 경기중 힘들어 할때 의족을 두드리며 그의 투혼을 일깨운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최동원이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린 것은 경남고 2년때인 1975년 전국 우수고교초청대회에서였다. 그해 2관왕이던 최강 경북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의 대기록을 달성한데 이어 다음 경기인 선린상고전에서는 ‘8회 노히트노런’을 거둬 고교야구사상 믿기 힘든 ‘17이닝 연속 노히트노런’으로 야구계가 발칵 뒤집혔다. 당시 실업야구 포함, 국내 야구선수로서는 처음으로 어깨보험(50만원 보상)에 들어 매스컴의 화제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1976년 황금사자기대회에서는 더 눈부신 피칭을 선보였다. 선린상고와의 4강전에서 11K 완봉승, 군산상고와의 승자결승에서 20K 완투승, 역시 군산상고와의 최종 결승에서는 12K 완투승으로 최동원 혼자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것. 그야말로 ‘한국시리즈 4승’의 전초전이었다.
최동원과 대결했던 군산상고 김성한(전 해태 감독)은 “우리 선수들이 결승전 하루전날 한양대 야구부에 있던 피칭머신으로 150km대의 강속구에 대비한 타격 훈련을 했었다. 하지만 큰맘먹고 타석에 들어섰음에도 공이 너무 빨라 배트가 나가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연세대 1년때 국가대표로 뽑힌 후 1977년 대륙간컵 대회 최우수선수상, 1982년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서울) 우승 주역으로 활약했다.
프로 입단은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출전으로 인해 1년이 늦춰져 1983년초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었다. 첫해 성적은 9승(16패 4세이브)으로 기대에 못미쳤으나 1984년에는 무려 27승(13패 6세이브)을 따내 시즌 MVP, 다승왕, 탈삼진왕(223K, 현재까지 역대 최다기록), 투수부문 골든글러브 수상 등 4관왕에 올랐다(한국시리즈 MVP도 당연히 돼야 했으나 기자단투표로 유두열에게 주어짐).

선수협 결성 주도, 미운털 박혀 삼성으로 이적
최동원의 생애에서 안타까운 세가지는 선수협회(노조) 결성에 앞장선것과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지 못한 것, 그리고 50대 초반의 ‘이른 별세’다.
먼저 선수협회 창설 주도. 최동원은 1985년 20승, 86년 19승으로 에이스의 건재를 과시했으나 87년 14승, 88년 7승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운명의 88년 가을, 해태 투수 김대현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고 의협심이 강한 최동원은 선수 복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연습생 선수들의 최저 생계비나 선수들의 경조사비, 연금같은 최소한의 복지 제도를 만들기 위한 순수한 마음에서 선수협 결성에 앞장섰다. 하지만 각 구단들은 이를 선수노조 결성의 불순한 의도로 판단해 ‘프로야구단 해체’등의 초강수로 맞서 결국 선수협 창립은 실패로 돌아갔다(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는 2000년 1월 최동원의 뜻을 기려 창립총회를 갖고 발족).
구단으로부터 미운털이 박힌 최동원은 그해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