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원, 남승룡, 엄복동, 이홍복'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한명, 한명이다. 이름 석 자만으로 감탄사가 나오는 스포츠계 거목(巨木). 이들 4명이 대한체육회의 '2023년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 최종 후보자로 선정됐다.
고(故) 최동원(향년 53세)은 한국 야구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롯데 자이언츠 최초의 영구 결번(11번)을 받았다. 아마추어, 프로 시절 모두 절정의 기량을 뽐냈다. 프로 통산 100승, 2번의 20승 시즌, 80 완투 등의 족적을 남겼다.
그의 1984년 한국시리즈 기록은 '전무후무' 하다. 홀로 4승을 따냈다. 팀을 창단 첫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때부터 '무쇠팔'로 통했다. 훗날 영화(퍼펙트 게임)로도 이름을 떨쳤다. 최동원의 투구 루틴은 지금도 회자된다. 송진가루, 신발끈, 겉양말, 안경, 모자챙을 차례로 만지고 공을 던졌다.
국위선양 업적도 다수다. 1977년 슈퍼월드컵 우승, 1981년 대륙간컵 대회 최우수 선수,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등이 그것. 1978년에는 체육훈장 거상장을 받았다.
고(故) 남승룡(향년 88세)은 마라톤의 지휘자로 불리어진다. 1932년 제8회 조선신궁경기대회 마라톤 1위를 기록했다. 1933년 제20회 일본육상경기선수권대회 마라톤에서 2위를 달성했다. 1936 베를린 올림픽은 손기정과 함께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 2시간31분42초 기록으로 동메달을 획득했다.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서윤복의 코치로 참가해 서윤복을 우승 시키는데 일조했다. 그해 1월부터 63년 9월까지 대한육상경기연맹 이사를 역임했다. 1970년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다.
고(故) 엄복동(향년 58세)은 일제강점기 활동한 자전거 선수다. 1920년 경성시민대운동회 자전거 부문에서 우승했다. 1923년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에서 1위를 달성했다. 1932년 전 조선 남녀자전거대회 1만미터 경주에서 우승했다. 대한사이클연맹은 그를 기려 1977~ 1999년까지 '엄복동배 전국사이클경기대회'를 열었다. 엄복동의 자전거는 2010년 근대 문화재로 등록(제466호) 됐다.
이홍복(89)은 후보자들 중 유일한 생인(生人)이다. 광복전은 엄복동, 광복 후는 이홍복이 존재했다. 임복동이 나라 잃은 국민의 마음을 달랬다면 이홍복은 6.25 전쟁의 상처를 치유해 줬다.
1958년 라디오에서 전해진 "후지산이 무너졌습니다"라는 아나운서 목소리. 이홍복이 제3회 도쿄 아시안게임 사이클 단체전과 개인전에서 2개의 금메달을 딴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는 1980년대 경기용 사이클의 국내 제작 및 보급에 기여했다. 1983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사이클 경기장 건립을 추진했다. 전 인천광역시체육회 이사 및 고문을 역임했다.